"中 따라잡자" 한국의 필사적 노력…'세계 최고' 기술 만들다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中 따라잡자" 한국의 필사적 노력…'세계 최고' 기술 만들다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中 따라잡자" 한국의 필사적 노력…'세계 최고' 기술 만들다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Blog Article

국립중앙박물관 '새 나라 새 미술' 1부 전시 마지막 부분의 전경. 우리 역사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나라는 어디일까요. 이 질문을 했을 때 가장 많이 나오는 답변은 보통 두 개. 하나는 당대 동아시아의 강대국이자 광대한 영토를 자랑했던 고구려, 다른 하나는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인 대한민국(현대 한국)입니다. 동아시아연구원(EAI)이 5년마다 시행하는 설문조사에서는 고구려와 대한민국이 각각 30%가량 표를 받으며 1위 자리를 다투곤 합니다. 그 뒤를 잇는 건 의외로 통일신라 시대입니다. 조선은 그다음에야 나오는 이름입니다. 득표율은 10% 미만. 별로 인기가 없다는 얘깁니다.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처럼 가장 많은 존경을 받는 위사금융연체전화
인들이 모두 조선시대 인물이고, 왕의 계보(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를 줄줄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조선에 대해 많은 정보가 알려져 있는데도 말이지요. 아마도 이런 결과는 조선 말기의 부패와 혼란 때문일 겁니다. 조금은 억울한 것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느 나라든 망할 때 엉망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고려말이나 신라말과 달리 실매물
조선 말기는 불과 100여년 전에 있었던 훨씬 가까운 과거. 그만큼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고, 일제강점기와 남북 분단 등 지금까지 그 여파가 이어지는 현대사의 비극들과도 연결돼 있습니다. 더군다나 같은 시기 세계를 쥐락펴락하던 서양의 강대국들과 비교하면 조선은 더욱더 뒤떨어지는 국가로 느껴지곤 합니다. 하지만 조선을 그렇게 초라한 모습으매매 잔금
로만 기억할 필요는 없습니다. 신분제의 폐해와 극도의 보수성,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우리가 아는 조선의 좋지 않은 모습은 대부분 중기(中期) 이후에 본격화된 것들입니다. 하지만 국가의 기틀을 잡고,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한반도의 영토를 완성했으며, 기술을 발달시켰던 조선 전기(前期)의 모습은 분명 강렬하고도 세련된 혁신의 빛을 뿜고 있었습니다. sbi저축은행 모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최근 개막한 전시 ‘새 나라 새 미술’은 조선 전기의 이런 진면목을 보여주는 전시입니다. 오늘은 전시 1부 ‘백(白)’에서 만날 수 있는 백자들을 통해, 당시 조선의 모습을 비춰 보겠습니다.  고려 말 ‘막장’을 끝내다 조선 이전 왕조, 고려에 대한 대중의 인상은 썩 나쁘지 않습니다. 코리아(K학자금대출자격
orea)라는 이름의 기원이기도 하고, 개방적인 분위기와 외국과의 교류, 고려청자와 불교미술로 대표되는 화려한 문화 등의 이미지가 있기 때문인 듯합니다. 하지만 멸망 무렵의 고려 상황은 정말이지 엉망진창이었습니다. 국가 시스템과 기강은 형편없이 무너지고 있었고, 지도층은 정신을 못 차린 채 백성의 호주머니를 털어 자기 이권을 챙기는 데만 골몰하고 있었습니다국세청자영업자
. 안 그래도 자연재해 때문에 먹고 살기 어려웠던 일반 백성의 삶은 괴롭기 짝이 없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외적의 침입이었습니다. 중국 쪽에서는 홍건적이 수도인 개경(개성)을 함락시킨 뒤 궁궐을 불태웠고, 일본에서는 왜구가 해안가뿐 아니라 한반도 전역에서 활개를 치는 등 사실상 전 국토가 짓밟히고 있었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중국이 서울시국민은행 마이너스통장 한도
청에 불을 지르고, 일본이 세금 수송 차량을 털어가는 ‘막장’ 상황. 하지만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나라가 잘 싸울 리 없었습니다. 이성계가 치렀던 전투. 조선을 건국한 군주 이전에 이성계는 고려와 고려 백성을 구한 전쟁 영웅이었다. 그는 단 한번도 전투에서 패하지 않았다. 새마을금고 이율
지휘 실력은 물론 개인적으로도 신궁(神弓)으로 불릴 정도로 무력이 뛰어나 왜구를 비롯한 수많은 적군을 쓰러트렸다. 전시는 이성계가 건국을 준비 중이던 1391년, 금강산 월출봉에서 측근들과 함께 미륵불에 바친 예물핸드폰비
(이성계 발원 사리장엄)로 막을 올린다. 불교에서 미륵불은 훗날 세상에 내려와 새 시대를 열고 민중을 구원할 존재. 고려 말 엉망으로 망가진 사회를 이성계 자신이 미륵불처럼 구원하겠다는 야심찬 포부가 담긴 유물이다. 바로 그때 등장한 구원자가 이성계였습니다. 이성계는 고려의 전쟁 영웅이었습니다. 3별내선암사
0년 넘는 세월 동안 한반도 전역을 장수로 누비며 중국·일본 등지의 세력과 싸웠고,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희대의 명장이었지요. 제1차 요동 정벌에서 요동성을 함락시킨 것도, 왜구를 몰살시킨 황산 대첩도 주인공은 이성계였습니다. 이런 본인의 능력과 시대적 상황, 천운이 겹치면서 이성계는 1392년 새로운 왕조 조선을 개국한 태조가 됩니다. 이렇게 시작된 조선 전기는 지금 ‘한국’의 정신적 뿌리를 만든 시기이자 한민족의 문화적 전성기로 꼽힙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설명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 ①영토. 세종대왕 시기 한반도 전체가 조선의 지배 밑으로 들어왔습니다. 이는 지금 대한민국 헌법이 규정하는 영토 범위와도 일치합니다. ②한민족의 자주성과 정체성. 고려는 원나라의 영향력이 매우 강했던 시기입니다. 반면 조선은 북방(함경도)에서 온 왕실과 남쪽의 사대부들이 만나 형성한 한민족의 나라였습니다. ③문화. 훈민정음을 비롯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주요 ‘전통문화’가 조선 전기의 것입니다. 4군 6진 개척으로 한반도 영토가 완성됐다. 이런 성과는 고려 말 망해가던 국가를 싹 뜯어고친 조선 초기의 적극적인 경제·사회 개혁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그 과정과 성과를 가장 보여주는 게 조선백자의 변화입니다. 이번 전시의 시작이자 가장 중요한 부분을 백자가 차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흰빛을 향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흰 도자기인데, 대체 뭐가 대단하다는 건가’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이야 도자기가 흔해빠진 시대이니 그럴 만도 합니다. 하지만 옛날 동아시아에서 도자기의 수준은, 기술력과 시스템 등 그 사회의 현재 모습을 보여주는 하나의 성적표 역할을 했습니다. ‘정릉’이 새겨진 청자 상감 연꽃 넝쿨무늬 대접. 고려 말 만들어진 이 청자는 여전히 아름답지만, 전성기 고려 청자에 비하면 그 소박함에서 국가의 쇠퇴를 느낄 수 있다. 고려 말기의 도자기들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고려청자는 한때 동아시아에서 최고 인기를 자랑하는 예술품으로 인정받았습니다. 하지만 나라가 망해가던 고려 말에는 이런 자랑스러운 도자기 기술도 뒷걸음질 치고 있었습니다. 왜구의 침략으로 인해 한반도 남부에 주로 있던 공방들이 파괴됐고, 장인들도 죽거나 흩어졌기 때문입니다. 유통망도 사실상 마비돼 청자를 운송하고 소비할 여건도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 탓에 14세기 후반 만들어진 고려청자는 12~13세기 작품에 비해 색이나 완성도, 무늬 등이 확연히 뒤떨어집니다. 하지만 조선 건국 50~60년 이후 조선백자의 수준은 전통적인 도자기 선진국이었던 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으로 발전했습니다. 흰 색의 단단한 도자기를 뜻하는 경질(硬質) 백자는 당시 전 세계에서 중국(명나라)과 한국(조선) 두 나라만 만들 수 있는 최고의 선진 기술품. 이해하기 쉽게 현대에 비유하자면, 미국과 일본이 1990년대까지 주름잡던 반도체 업계에서 후발 주자인 한국이 강국으로 올라선 것과 같은 놀라운 발전이었습니다. 전시는 1393년 정도전이 새 왕조의 위업을 기리는 악장(樂章·가사)을 올리며 남긴 말로 시작한다. 제작(制作)은 좁게는 새로운 음악의 제작, 넓게는 그 시대를 드러내는 독자적 제도·문화 창출을 뜻한다. 다시 말해 새 판이 열리면 새 규칙을 만들어야 하고, 그 중 하나가 문화라는 얘기다. 백자 상감 연꽃 넝쿨무늬 대접(국보). 15세기 작품으로, 연한 상아색은 백자를 향해 가고 있는 과정에 있다. 표면에 가늘고 탄력있는 선으로 연꽃과 넝쿨무늬를 새겼는데 이는 명나라 처오하백자 무늬와 비슷하다. 선을 파내고 어두운 흙을 넣는 상감 기법으로 장식했는데, 고려 도자기의 기법을 이어받았다. 오래된 요소와 새로운 요소, 전통과 외래의 것이 조화를 이룬 조선 초기의 발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유물이다. 고려청자의 명성이 워낙 높아 오해하는 분도 있지만, 백자는 사실 청자보다 더 기술적으로 발전한 도자기입니다. 더 단단해서 더 실용적이고, 음식을 담을 때도 아름답고 식욕을 돋웁니다. 레스토랑에서 파란색 그릇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쉽습니다. 하지만 백자는 청자보다 만들기가 훨씬 어렵습니다. 먼저 기술력. 백자는 1300도 넘는 초고온에서 구워내야 하는데, 이는 청자보다 100도 넘게 높은 온도입니다. 백자를 만들려면 초고온 환경을 만들고 이를 안정적으로 조절하는 공학적 기술이 필요하다는 얘기입니다. 장인 한두 명이 열심히 잘한다고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백자 제조에는 고도로 정비된 사회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구하기 어려운 원료인 백토(白土)를 찾아야 하고, 초고온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대량의 땔감을 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엉망이었던 도자기가 점점 완성도를 높여가고 결국 눈부신 순백을 띠게 되는 과정은, 조선이라는 나라가 과거의 혼란을 극복하고 문화를 꽃피우는 과정 그 자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백자 편병.  왕의 그릇 다시 조선이 세워질 당시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나라를 운영하려면 돈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국가의 근본은 세금과 재정 운용에 있습니다. 세금을 잘 걷어서 필요한 곳에 잘 쓰려면 나라 구석구석의 상황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조선은 전국 각지를 빠짐없이 조사해 지리지를 펴냈습니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 전시에 나온 세종실록지리지입니다. 여기엔 여러 인문·경제 관련 지리 내용과 함께 도자기의 생산과 관련된 정보도 적혀 있지요. 도자기 생산지에 대한 내용이 기록된 세종실록지리지. 여기에 더해 조선은 세금을 거두기 위한 시스템도 다시 정비했습니다. 한반도 국가들은 전통적으로 강과 바다를 통해 세금을 수도로 실어 날랐고, 이런 조운(漕運)제도는 고려시대 본격화됐습니다. 하지만 고려 말에는 왜구의 약탈 때문에 이런 세금 운송 시스템에 큰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조선은 이런 시스템을 다시 손질하고 강과 바다의 물길을 정비해 전국을 연결했습니다. 그러면서 도자기의 대량 생산과 운송을 위한 여건이 만들어졌습니다. 아무래도 도자기는 무겁고 깨지기 쉬워서, 육로로 운반을 하기가 쉽지 않았거든요. 새로운 왕조의 수도 한양(서울)은 전국의 물자를 빨아들이는 도시였습니다. 왕족과 관료, 사대부 가문이 사는 이곳은 생산자보다 소비자가 훨씬 많은 곳이었지요. 궁궐과 관청을 유지하고 생활을 영위하려면 여러 물건, 특히 질 좋은 물건을 많이 들여와야 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게 생필품인 그릇이었습니다. 밥을 먹을 때 쓰는 그릇, 물병, 술병, 장을 담을 항아리, 제사에 필요한 그릇 등은 늘 필요하니까요. 이제 한양 사람들은 전국 각지에서 생산한 도자기를 받아서 쓸 수 있게 됐습니다. 전국 각지의 도자기 생산지에서 보내온 도자기. 조선의 고품질 백자 생산은 형태도 모양도 품질도 제각각인 이 도자기들을 조사하고 관리하는데서 시작했다. 도자기의 수(數)는 충분하니, 이제 품질과 디자인을 따질 차례입니다. 그릇의 품질이나 크기가 동일하지 않고 제각각이면 아무래도 생활에 불편함이 있습니다. 게다가 지체 있는 가문, 특히 왕실에서 쓰는 그릇의 질이 낮다는 건 아무래도 모양 빠지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왕의 밥그릇에 금이 가 있다면 외국 사신이나 아랫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할까요. ‘나라가 많이 가난한가?’라는 의심부터 들 겁니다. 그러니 권력자가 쓰는 물건은 단순한 체면 문제를 넘어 권력과 질서의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조선은 도자기의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전국 각지의 도자기 생산지를 점검하고, 각 생산지에서 납품하는 그릇의 질을 상·중·하(上·中·下)로 매겼습니다. 중이나 하 단계를 받은 생산지에는 도지사·군수 등을 동원해 “똑바로 만들라”고 닦달했습니다. 대충 만드는 사람은 색출해 처벌하기 위해 밑바닥에 만든 사람 이름을 쓰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 생산지에는 견본품을 보내서 “이대로만 똑같이 만들라”고 지시했습니다. 나중으로 가면 도자기 생산 기법을 아예 바꾸도록 합니다. 장인의 재능에 따라 도자기에 무늬 그리는 솜씨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 아예 중앙에서 만든 도장을 찍어 무늬를 넣는 방식(인화기법)을 도입한 겁니다. 분청사기 인화·분장무늬 병과 백자 병. ‘곤남군장흥고집용’가 새겨진 분청사기 인화무늬 대접. 이렇게 시스템이 구축되고 노하우가 쌓이자 조선은 경질 백자를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됐습니다. 조선 건국 초기 “명나라 백자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물렁물렁하고 색이 탁하며 기술 수준이 낮다”는 평가를 받던 조선백자가, 불과 50~60년만에 세계 최고 수준을 따라잡은 쾌거였습니다. 이렇게 백자는 1430~1440년대 세종대왕 시기를 지나며 왕실의 그릇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15세기 후반에는 왕실 도자기를 조달하는 공장인 관요가 경기도 광주에 설치됐습니다. 조선은 이곳에서 전국의 뛰어난 장인들을 2교대로 동원하며 고품질 백자를 대량으로 찍어냈습니다.  흰빛이 품은 순수한 이상 이 모든 게 단순히 좋은 그릇에 밥 먹고 술 마시려고 벌인 일은 아니었습니다. 백자의 대량 생산은 국가 정체성과 국민을 형성하는 과정(네이션 빌딩)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거든요. 천지현황이 새겨진 백자 사발(국보). 2021년 이건희 회장 유족이 기증한 유물로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전반 만들어졌다. 크기가 크고 선이 단정한 전형적인 조선 전기 관요 순백자 발의 형태다. 천지현황은 굽 바닥에 새겨진 글자인데, 관요의 운영과 관련해 사용된 문자로 보인다. 고품질 백자 생산은 조선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는 지금처럼 전 국민이 교육을 받지도 못했고, 전화나 인터넷, 자동차도 없었습니다. 평생 궁궐 구경도 못 해보는 사람이 태반이었고, 국가가 어떻게 돌아가고 무슨 이념을 갖고 있는지 자세히 아는 사람도 드물었습니다. 대부분의 백성은 “새 왕조가 들어섰으니, 앞으로는 새로운 이념과 법, 질서에 따라야 한다”는 말을 들어도 별 감흥이 없었을 겁니다. 당장 일상에서 바뀐 게 별로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고품질 백자의 대량생산 덕분에 조선이 추구하는 질서와 정체성은 좀 더 손에 잡을 수 있는 형태로 널리 퍼질 수 있었습니다. 조선의 이념은 유교와 성리학이고, 그 의식인 제사를 지낼 때 쓰는 제기(第器)가 바로 백자. 왕실에서 지방의 향교까지 전국 모든 곳에서 똑같은 크기와 모양의 백자로 제사를 지낼 수 있게 되면서 사람들은 새로운 질서인 유교 아래 하나가 된다는 감정을 느끼게 됐습니다. 그 질서는 백자처럼 이전의 것보다 더 아름답고 순수하면서 튼튼한 것으로 느껴졌겠지요. 국조오례의서례. 의식에 필요한 항아리의 모양 등이 기록돼 있다. 광해군 태를 묻은 기록이 새겨진 지석과 태항아리. 청화백자 구름 용무늬 병. 16세기 작품으로, 조선 전기 백자 중에서 용을 그린 드문 예이다. 왕이 사용하기 위한 그릇이며, 왕실 행사에서 사용된 술병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보물로 지정돼 있다. 백자는 왕실의 제사, 결혼, 손님맞이에도 사용됐습니다. 왕실과 자손의 운명과 생명력을 상징하는 태(胎·태반과 탯줄)는 특별한 백자 항아리에 담아 보관해 왕조의 영원함을 기원했습니다. 한편 귀한 수입산 안료(코발트)를 사용해 만드는 청화백자는 특권의 상징이었습니다. 왕실과 고위 관료의 술잔으로만 제한적으로 사용이 허용됐고, 덕분에 권위와 부의 상징이 되어 민간의 돈 많은 집안에서는 청화백자를 구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1491년 성종이 백자로 된 술잔을 하사하며 남긴 말은 백자의 이런 위상을 잘 보여줍니다. “이 술잔은 정결하고 흠이 없어 술을 부으면 찌꺼기가 다 보인다. 사람에 비교하면 대공지정(大公至正·아주 공평하여 지극히 바르다)해 한점의 사사로움도 없는 것과 같다.” 백자는 단순히 실용적이고 아름다운 그릇을 넘어 이상적인 사람을 말하는, 조선의 이상을 상징하는 물건이었던 것입니다. 백자 사발. 국립중앙박물관 '새 나라 새 미술' 1부 전시 마지막 부분의 전경. 왼쪽 끝의 소박한 그릇에서 시작해 오른쪽 새하얀 순백자에 이르는 발전의 여정. 1부 전시의 마지막에 있는 압도적인 위용의 진열장은, 조선이 건국해 자리를 잡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국보와 보물 등 지정문화재 89점을 비롯해 600여점에 이르는 전시작 중 상당수가 이 부분에 집중돼 있습니다. 덕분에 진열장 앞은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서성이는 관람객들로 늘 붐빕니다. 한석봉의 글씨와 고사관수도 등이 있는 2부, 화려하면서도 마음 따뜻해지는 불교미술의 3부, 마지막의 훈민정음보다 이곳이 인상적이었다는 관객도 많습니다. 그 앞에서 우리는 여러 생각을 떠올리게 됩니다.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조선 초기의 패기와 이상, 여러 격변 속에 빛을 잃어갔던 조선의 기구한 운명, 그런데도 여전히 전시장에서 순백의 빛으로 빛나는 백자의 존재까지…. 그 좋았던 조선의 ‘첫 페이지’를 이보다 더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또 없을 겁니다. 전시 폐막(8월 31일) 전 직접 만나보시길 권합니다. 오는 15일까지는 개막을 기념해 무료 개방합니다. **이번 기사는 국립중앙박물관 전시도록 <새 나라 새 미술 : 조선 전기 미술 대전>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 담당 기자가 미술사의 거장들과 고고학, 역사 등을 심도 있게 조명하는 국내 문화 분야 구독자 1위 연재물입니다. 매주 토요일 새로운 이야기로 찾아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미술 소식과 지금 열리는 전시에 대한 심층 분석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 구독 중인 7만여명의 독자와 함께 아름다운 작품과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앞서 다뤘던 화가들의 이야기와 아름다운 그림들은 두 권의 책 <명화의 탄생, 그때 그 사람>과 <명화의 발견, 그때 그 사람>으로 곁에 두고 즐길 수도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Report this page